‘오 마이 파파’ 와 ‘오 마이 프레지던트’

 

 

▲ 이대현

 

 

조용하지만 큰 울림의 영화 한편이 상영 중이다. 박혁지 감독, 조미혜 작가의 다큐멘터리 <오 마이 파파>. 한 신부의 이야기이다. 그 주인공은 소 알로이시오. 한국 이름이 소재건(蘇再建)인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그것도 이국땅에서 평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은 잘 몰라도, 대한민국 중년들은 부산‘소년의 집’은 알고 있다. 한때 축구를 잘해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서만은 아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오 마이 파파>는 그 ‘희망’을 만든 소 신부의 낡은 사진과 자료를 뒤지고,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가 남긴 흔적들을 찾아가면서, 그의 시간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지 확인시켜 준다.

 

과장도 없다. 죽은 자에 대한 미화도, 상업적 계산의 극적인 장치도 없다. 카메라와 마이크는 마치 구경하듯 비추고, 소리를 담으면서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 소 신부의 소명과 사랑, 용기와 실천, 그리고 희망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의 봉사와 헌신의 삶이 더욱 소중하고 그리운 것은 지금 우리 앞에서 탐욕과 부정, 비겁과 절망의 시간들 때문이리라.

 

소 신부는 가장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삶을 소명(召命)으로 받아들였다. 누구도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했지만, 말뿐이었고 소 신부는 그것을 실천했다. 어떤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 하늘의 일에는 우연이란 없다. 누구에게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고 준비해 놓는다는 것이다.

 

소 신부도 그랬다. 성모 발현지인 벨기에 바뇌에 있는 성모상을 자주 찾아가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제일 어렵고 가난한 나라에서 봉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1957년 27세에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한국 땅을 찾은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는 한국이 가장 가난한 나라, 전쟁으로 고아와 굶주린 아이들이 넘쳐나는 나라였기에 이역만리 낯선 땅을 선택했다. 소명을 지키려 했기에 이 땅에서 끝나지 않고 평생 가난한 아이들을 찾아 나섰고 죽는 날까지 아이들만을 생각했다.

 

그에게는 말이 아닌, 진실하고 깊은 사랑이 있었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종교와 인종과 국적을 떠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라는 성모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1957년 12월 8일, 첫 부임한 부산에서 그의 사랑의 마음과 눈에 들어온 것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그들은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거나, 피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도 냄새와 파리 떼로 눈을 뜰 수 없는 쓰레기더미 속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그가 막사이사이상을 받으러 간 1983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전에도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다. 필리핀 지도자들도 그들을 보았다. 그러나 사랑을 가지지 않은 눈이었기에 보이지 않았고, 봐도 가슴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오 마이 파파>는 사랑을 가진 사람은 눈부터 다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눈으로 자신이 손 잡아주어야 할 사람, 함께 가야할 사람을 모두 담는다고 말한다. 소 신부는 가난한 한국의 고아들을 보았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깨달았다. 그래서 1964년‘마리아 수녀회’를 창설해 고아들에게 가장 간절한 엄마의 사랑부터 선물했다.

 

그는 형식적인,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랑하기 위한 사랑과 봉사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아 수녀들에게“늘 아이들 곁에 같이 있어라. 기도 중이라도 아이가 부르면 달려가라. 아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 먼저 봉사하라”고 했다. <오 마이 파파>를 통해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가난한 사람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이 나라 대통령, 국회의원이라고 모르겠는가. 단지 흉내만, 생색만 냈기에 지금도 가난하고 상처 받은 아이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오 마이 파파>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고, 감동적인 장면은 멋지게 지은 필리핀과 과테말라의 소년·소녀의 집도 아니다. 정지 흑백화면으로 담은 소 신부의 표정이다. 따스하면서도 강렬한 눈빛. 거기에서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그의 사명과 실천 의지를 읽는다. 게다가 우리를 숙연하게, 부끄럽게 하는 장면은 또 있다. 판자로 지은

 1963년의 그의 오두막 사제관과 그의 유품인 닳고 해져서 군데군데 꿰맨 평생 한 벌뿐인 수단, 낡은 구두, 그리고 색 바랜 안경이다.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지독히 가난하고 검소했던 소 신부. 정말 새 것이 싫어서 마다하고 낡은 것을 고집했을까. “차라리 애덕은 어렵지 않으나,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한 수녀의 고백이 솔직하다. 그러니 1982년에 미국의 도티 부부가 감동해 5달러만 해도 통 큰 기부였던 당시 무려 25만 달러를 ‘소년의 집’ 아이들의 수영장 건설을 위해 내놓지 않았는가.

 

 

 

스스로에게 엄격했기에 소 신부는 누구보다 용기 있게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사명을 실천할 수 있었다. “내 부모형제, 조카라면 그렇게 살도록 두겠는가”라는 말에서 부랑아보호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폭력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은, 비겁한 평화를 거부한 그의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말했다. “내 희망은 보통 한국 가정의 아버지 것과 똑같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교육 받아서 사회에 나가서 사는 것이다”

 

그에게는 지금도 아들, 딸이 세계 여섯 나라, 10개 도시에 2만여 명이 있다. 멕시코 과달라하라 소년의 집에서 봉사하는 수련 수녀인 안나 히메네스처럼 그의 뜻을 따르며 오늘도 어떻게 하면 이 가난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 신부를 기억하고. 그에게 감사하면서 그곳에서 희망을 키우기 위해 찾아온 소년은 희망과 꿈을 갖게 됐고, 그런 아이의 아버지는 “주님이 도와주리라”고 믿는 다. 희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이다. 더구나 아이들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꿈과 희망조차 잃어버리게 만든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과 죄는 없다. <오 마이 파파>는 묻는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를 쳐다보고, 누구를 외면하고 있습니까?”라고.

 

그렇게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더 많은 학교를 짓고 싶었던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1992년 3월 16일 루게릭병으로 우리와 작별했다. 그는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내 일을 다 한다’는 마음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소명과 사랑, 용기와 실천의 시간들이 “내 뜻대로만 행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오히려 반성한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은 “너가 시작은 하지만 끝낼 필요는 없다. 이것은 너의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말해준다. 어쩌면 그 메시지야말로 살아있는 우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비 때마다 우리보다 더 가난한 나라에서도 봉사자들과 후원자들이 그의 음악을 이어가고 있다. 소 신부에게 복음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이웃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느끼고 좋아할 수 있게 표현하고 실천할 때 우리를 지켜주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 준다. 서로 하나가 된다.

 

그의 사랑의 실천으로 ‘희망’을 가꾸어가는 필리핀의 가난한 소녀들이 그의 장례미사에서 눈물을 훌쩍이며‘오 마이 파파’를 불렀다. 그 아버지는 바로 소 신부였다.‘오’는 슬픔과 안타까움과 존경의 외마디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오 마이 프레지던트’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외마디 ‘오’는 탄식과 절망과 분노이다.

 

누구에게나 역사는 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도 지나온 길을 누군가는 기억한다. 그 시간과 기억의 여행이 우리를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만들면서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그 시간과 존재조차 기억하기 싫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오 마이 파파’와 ‘오 마이 프레지던트’처럼.

 

<주필ㆍ국민대 겸임교수ㆍ前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대현 주필  guriq@naver.com

이 칼럼은 에스알(SR)타임스와 콘텐츠 제휴로 게재하는 것이며, 외부 칼럼은 본 협회의 공식 의견과 편집 방향과 다를수 있습니다.여러 블로그 독자들의 많은 구독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한국조사기자협회 취재팀 press@jo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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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조사기자협회는 1987년 국내의 신문, 방송, 통신사의 조사, 정보, 자료, DB업무를 담당하는 조사기자들의 모임으로 출범하여, 2009년 회원들의 연구활동에 기초한 신문 및 방송 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사단법인으로 재출범하였으며, 언론공익활동으로 신문논술대회, 조사연구 발간, 세미나·토론회, 보도연감 출판 등의 사업을 하고 있는 언론단체입니다

※ 이 칼럼은 문화일보  [오피니언] '오후여담'을 옮긴 것을 밝힙니다.

 

 출처: 문화일보

 


박현수 조사팀장

 

 

해녀는 제주도의 상징이고, 해녀의 원조는 제주도다. 세계에서 산소통 없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은 한국 해녀와 일본 해녀인 아마(海女)뿐이다. 제주 해녀는 19세기 말엔 부산 등 한반도 남쪽은 물론 일본, 중국 다롄(大連)과 칭다오(靑島),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조선 인조(1623∼1649) 때 제주 목사가 남녀가 함께 바닷속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해녀들은 해남(海男)들과 함께 물질했다. 이후 점차 해남들이 사라져, 현재 7명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전의 해녀복도 1970년대 초 일본에서 일명 ‘고무 옷’이라고 불리는 지금의 검은색 잠수복으로 대체되면서 작업환경도 나아졌다.

제주 해녀와 일본 아마의 차이점은 제주 해녀가 스티로폼 등으로 만든 부력 도구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고정한 뒤 조업하는 데 반해 아마는 부부가 2인 1조로 물질하는 게 특징. 일본으로 출가한 제주 해녀들에 따르면 월평균 500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데다 전문직으로 대접받고 있다고 한다. 반면 제주 해녀는 연평균 수익이 500여만 원에 불과하다. 반농반어로 한 달에 10∼15일 조업에 나서는 데다 감귤 수확철엔 과수원 일에 매달린다.

‘제주해녀문화’가 지난 1일 일본의 ‘아마’를 제치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이를 기념해 제주 해녀의 삶과 문화에 대해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특별전을 오늘부터 내년 3월 말까지 연다. 오는 10∼11일엔 제주해녀문화를 모티프로 한 영화 전도연 주연의 ‘인어공주’와 윤여정 주연의 ‘계춘할망’ 무료 상영회도 연다.

하지만 1965년 2만3081명에 달하며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해녀 수는 지난해엔 4337명으로 해마다 줄고 있다. 60세 이상의 고령자가 85.7%에 이른다. 이런 추세라면 10년 이내에 지금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시대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긴 하지만, 머지않아 명맥이 끊어질 수도 있다. 일본 정부는 아마를 해녀의 원조라고 세계에 알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자칫 ‘김치와 기무치’처럼 될 수도 있다. 기왕 인류의 유산으로 지정됐으니, 제주 해녀가 인류의 문화를 더 풍부하게 하는 모습으로 오래오래 남아 있도록 연구 사업과 체계적 지원이 필요하다.

문화일보 2016-12-06 게재.
 
(편집=한국조사기자협회 취재팀 press@jo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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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은 문화일보  [오피니언] '오후여담'을 옮긴 것을 밝힙니다.

 

 

 

출처: 문화일보

 


박현수 조사팀장

 

 

최초의 고속철도는 1964년 개통한 일본의 신칸센(新幹線)이다. 신칸센은 그해 도쿄(東京)올림픽 개막과 함께 운행을 시작했다. 도쿄∼오사카(大阪) 515.4㎞ 구간을 시속 270㎞로 주파했다. 이어 프랑스의 TGV와 이탈리아의 ETR가 1981년, 독일의 ICE가 1988년에 각각 개통됐다. TGV(Train a Grande Vitesse)는 프랑스어 ‘매우 빠른 열차’의 약칭이다. 파리∼리옹 노선이 처음 운행했다. 개통 이래 단 한 건의 인명 사고 없이 연인원 2억 명의 수송 기록 돌파가 자랑이다. 신칸센과 TGV는 각각 일본과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불릴 만큼 양국 국민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중국의 고속철도는 독일 ICE와 일본 신칸센 기술을 도입하면서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톈진(天津) 간 117㎞에서 처음 운행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단일 고속철도 중 가장 긴 구간은 베이징과 상하이(上海)를 잇는 징후 고속철도로 1318㎞에 달한다. 중국이 세계 고속철도시장을 휩쓸고 있다. 세계 고속철도 시장점유율도 이미 절반을 넘었다. 이 분야 선두주자인 일본을 제친 것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비결은 값싼 인건비로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한 건설비용, 최고 시속 486㎞에 이르는 기술력, 세계 최장 노선 시공력 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1992년 서울∼부산 간 경부고속철도 건설계획이 확정돼,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가 차종으로 선정되면서 2004년 KTX가 개통됐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고속철도시대를 연 것. 우리 손으로 만든 국산 1호 고속열차는 2010년 운행을 시작한 KTX-산천이다. 몸체가 토종 물고기 산천어의 유선형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로써 세계 4위 고속철도 기술보유국에 이름을 올렸다.(김규회, ‘상식의 반전 101’, 끌리는 책) 

다음 달 9일 개통하는 수서발 고속철도인 SRT 예매가 22일부터 시작됐다. 우리나라 철도 역사 117년 만에 서비스 경쟁 체제에 돌입하게 된 것. SRT는 수서∼부산 간 하루 왕복 80회, 수서∼광주 송정·목포 간 왕복 40회를 달린다. SRT 개통으로 보다 적은 비용으로 편리하게 철도를 이용하게 돼 반갑다. 역대 최장기 파업을 벌이는 KTX 노조와 근로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문화일보 2016-11-23 게재.
 
(편집=한국조사기자협회 취재팀 press@jo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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